하늘씨앗교회

참된 토대 (롬 3:27-28) / 마틴 로이드 존스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영적 침체”, 2장, 마틴 로이드 존스, 강남호 개정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7–28)


이 나라에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적 침체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침체를 영적 우울증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자녀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축복을 영적 침체 때문에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적 침체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영적 침체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둘째, 영적 침체에 빠진 그리스도인은 의도치 않게 복음을 왜곡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볼 때, 기쁨과 행복이 우리에게 없다면 누가 우리 말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우울하고, … 침체되어 있고,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예수님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목이 아프게 말해 보아야 어찌 그들이 우리 말을 신뢰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사상 복음이 힘 있게 증거되던 시기의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반대로, 복음이 힘을 잃고 교회가 쇠퇴하던 시기에는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었고 우울하고 어두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적 침체에 빠지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기초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히 6:1/새번역)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반드시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영적으로 침체된 이런 사람들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압니다. 고백도 하고, 심지어 토론할 만큼의 지식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가장 기초적인 복음 진리가 자기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지식으로는 알지만 경험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기는 증상들은 매우 심각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 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압니다. 활력과 기쁨에 가득찬 성도를 보고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난 저렇지 못한데, … 저 사람에게는 나에게 없는 뭔가 있는 것 같은데, … ”


교회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옛 성도의 전기를 읽으면서, 빛나는 옛 성도와 자기의 심각한 차이를 바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서 변화를 이루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전에 많이 추구하고 시도를 해 보았지만 계속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른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와도 같습니다. 수련회도 참석해 보고, 신앙 서적도 읽어보고, 기도와 성경 묵상를 힘써 보기도 하지만, … 자신의 영적 상태가 좀 나아지는 듯했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 이런 상태를 반복하다 보면 이른바 “영적 무기력증”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지속하다 보면 더 큰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시도조차 조심스러운 그런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 저는 이런 사람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합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제가 분석한바, 이런 사람들의 진정한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믿음의 참된 토대가 불안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존 웨슬리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어떤 이들은 1738년, 모라비안 교도인 피터 뵐러라는 사람과 만난 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존 웨슬리는 피터 뵐러를 만나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단지 피터 뵐러의 도움으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진정으로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전에도 존 웨슬리는 이 진리를 알고 설교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가 진정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경험적으로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존 웨슬리보다 더 노력한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존 웨슬리는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우 불행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에 사로잡히기 전까지,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임에도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전혀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매우 흔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아주 많다고 주장합니다. 본인 스스로 성경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음의 참된 토대가 매우 허약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마치 생명이 없는 좀비처럼 만들어버리는 이런 상황의 심각성과 보편성을 보면 이것이 마귀의 전략임이 분명합니다!
마귀는 지금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역사합니까?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나 그리스도인의 목표에 관해서는 온갖 노력을 다하도록 만듭니다. 온갖 방법론과 인간적인 노력에는 온 힘을 다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믿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서 정작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 곧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못 보게 만듭니다. 


이런 전략하에 전술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중생이나 믿음에 관한 교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교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있는 심각한 죄들을 고발하기도 하고, … 믿음의 토대를 흔들려는 마귀의 전술은 매우 교활합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낮추어 놓으신 구원의 문턱을 조금이라도 높여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높아진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신앙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목표를 낮추려고 노력합니다. 대충 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의롭게 되는 방안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문턱을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교활하고 무서운 전략 전술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러한 전략으로 유대인들을 오도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는 로마 교회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에 나오는 영지주의나 적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실제 경험이었습니다. 마귀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비틀어서 특수한 사람들만, 즉 영적 엘리트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사람들이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참된 복음으로 로마교회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로마교회 성도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너무나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갖가지 술수로 단순한 이 진리를 혼란스럽게 하여 많은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유대인의 문제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깊이 이해하고 철저하게 지켜서 의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율법이 오히려 구원의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아무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름없는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처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로마서를 읽던 유대인들이 즉시 반발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을 것을 충분히 예상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안에서 가상의 유대인이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를 비참하고 불행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지금도 제가 죄에 대해 설교할 때마다 회중석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유대인이 했던 이런 저항과 반론이 튀어나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로마서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그렇습니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소망 없는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달아 여러분을 진정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분명한 논리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의 복을 누리려면 사도의 논리를 따라야 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어두운 후에야 빛이 오는 것입니다. (새찬송가 487장)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신지자 시므온의 예언처럼 우리는 먼저 넘어뜨림을 당하여야 세우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눅 2:34)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 이것은 우리 구원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필수 과정입니다. 


송요한(宋尚节 John Sung)도 존 웨슬리도 마르틴 루터도 그랬습니다. 그분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분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던 도중에 자기가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절망하고 나서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를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자매가 생각납니다. 자매가 다니던 교회에서 죄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회심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타락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사람들이 완전히 바뀌어서, 말 그대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태 신앙이었던 자매가 저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목사님, 제가 차라리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지금이라도 타락하여 저분들과 같은 큰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타락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 자매의 문제점을 아시겠습니까? 제가 그 자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 자매에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자매는, 단 한 번도 자기가 죽어서 지옥 가야 마땅할 죄인임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죄인 된 자기 모습을 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말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을지 몰라도 경험적으로는 한 번도 철저하게 절망한 경험이 없습니다.


저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전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고 제 주위에는 모범적인 신앙 친구들만 있었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을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자라온 환경에서 술, 담배, 매춘 같은 것은 유혹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술 한 잔 정도는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어찌 죄에서 구원받은 기쁨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구원받았음에도 담담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죄인의 분명한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거룩한 율법을 제시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빛을 회피하고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는 그런 사람들은 평생 자기가 바로 지옥에 가기로 정해진 죄인의 괴수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죄인임을 알 수가 있을까요? 


바울이 로마서 2장과 3장에서 내내 다루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롬 3:23) 여기서 모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과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복음은 더럽고 방탕한 죄를 물먹듯이 먹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진정으로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는 죄에 대한 무시무시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몇 가지 행동에 국한해 놓고,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좀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비교해서는 자기가 죄인임을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마틴 루터도 송요한(송상절; 존 성)도 존 웨슬리도 입술로는 죄인이라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자기가 죄인임을 언제 깨달았습니까? 죽게 되어서야 자기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대서양 한복판의 폭풍우 속에서도 의연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단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이른바 부활 신앙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믿음의 실체를 그때야 객관적으로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웨슬리의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라비안 교도의 믿음은 자신의 믿음과 달랐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죽음이 임박해서도 기쁨과 확신을 잃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때 처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과 자신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모라비안 교도들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존 웨슬리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기가 죄인임을 알려면 남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계속 배우고 있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이 율법을 어떻게 설파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 (막 12:30–31)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왜 만드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우주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소요리문답 내용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제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제 신앙 경험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도왔던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 지식을 믿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관해서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이 시금석을 여러분에게 적용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저런 일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질문은 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살아계시고 참되신 실제적인 사랑의 대상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사랑의 대상이신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사실이나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즐거움의 원천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 환한 표정으로 진정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즉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야만 할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물론 율법이 금하는 특정한 죄를 지으면 더 죄책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설사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 삶에 만족하고 남과 비교하여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죄입니다. 성전에서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던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지옥에 갈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흉악한 죄인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진리를 모른다는 면에서 죄인입니다. 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더 흉악한 죄인입니다. 로마서가 그러한 사람의 죄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19)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을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아예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만 자신을 친히 보이시고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제1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복음의 두 번째 원리로 이끕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두 번째로 알아야 할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에게 말한 요지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길이 있다. 이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인류의 위대한 스승일까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논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자기의 삶을 바라보고,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에게 행한 일들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육신을 입고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온전한 충성과 순종을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즉,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시고,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롬 3:25)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죄가 처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벌이 죽음이라고 하셨고 죄가 있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가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 모든 죄의 책임을 예수님에게 지우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었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 죄를 처리하시고 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죄를 벌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당하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인간이 감히 설명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설명해야 했고 저도 사도의 설명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셔서 죄를 처벌하지 않은 채 용서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죄를 벌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죄를 이미 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의 효력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고 율법이 부과하는 형벌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거룩한 율법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친 아들의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의를 주어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믿거나 의지하면 안 됩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사도가 묻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 (롬 3:27)


이제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차원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점건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말로 자기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이 말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마 12:37) 정말로 그렇습니다. 저는 종종 상담중에 이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그때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을 알려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는지,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설명을 마치고 저는 반드시 묻습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이제 믿게 되셨나요? 형제님!” 상대방이 그렇다고 하면 저는 말합니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주님께 그렇게 말씀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저합니다. 저는 금방 그 사람이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감지하고 묻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왜 망설이십니까?” 그럴 때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아무래도 난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순간 복음에 관한 저의 모든 설명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닫습니다. 답답한 이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를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낮추신 문턱을 스스로 높인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자격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누구도 자격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갖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오직 그리스도만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너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계속 자신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구원의 문턱을 높이며 “아, 나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어. 난 죄인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의 문턱을 높이지 마십시오.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는 그런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우울하고 계속 침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나아지는 듯 하다가도 금방 되돌아가 버립니다. 계속 영적 조울증을 겪다가 결국은 모든 일에 무감각해집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임을 명심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더는 자기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든, 무슨 짓을 했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제가 주일마다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여러분이 온갖 죄를 짓고 살인까지 저질렀다고 해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나 저와 여러분에게 소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제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이제는 영적 우울증이 지긋지긋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과거에 안녕을 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과거의 죄가 덮여 여러분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믿으셔야합니다.


다시는 과거의 죄를 잊으십시오.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다 끝났다.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는 소멸되었다.” 이것이 첫걸음입니다. 이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슬픔이 물러가고 기쁨이 옵니다. 그래야 거룩한 성령께서 순결한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셔서 여러분에게 온갖 축복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 뒤에 삶의 변화와 거룩한 삶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참된 행복과 기쁨의 문이 열립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삶을 살겠다거나 금식하겠다거나 노력하겠다거나 기도하겠다는 결심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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