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말아라 (마 6:25-34) / 산상수훈 32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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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보물을 더 사랑할 위험을 경고하셨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믿음의 선배들의 권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그러면 너희는 맘몬에게서 놓여나서 참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난번 말씀의 결론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며 적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일 2: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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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늘 결단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늘 결단의 기회를 주십니다.
“…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 (왕상 18:21)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때 이미 이런 결단을 하였습니다.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다”라고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결단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단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우리의 결단이 구원을 얻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내내 계속되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 “그러므로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라고 하신 까닭은 오늘 본문 말씀이 지난번 말씀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는 “너희가 맘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므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우리의 걱정과 염려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보물을 섬기는 자에게는 걱정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자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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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가 왜 걱정을 합니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데 우리가 왜 걱정을 합니까? 지난 주일과 오늘 주님의 말씀을 큰 맥락에서 대략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순전한 눈, 성한 눈으로 똑바로 보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 우리가 성치 않은 눈, 사악한 눈으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중적으로, 흐릿하게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걱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은 이런 식으로 오늘 본문 말씀과 이어집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만약, … 하나님도 바라보고 세상의 보물도 바라보고, 이중의 눈을 가지고, 혼란스러워하고, 왔다 갔다 하고, 이것을 추구하다가 저것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걱정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귀해 보여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아, 이것이 아니네!” 하면서 다른 곳으로 달려갑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추구하다가, … 어떤 때는 이 세상을 추구하다가, … 머뭇거리고, 선택하지 못하고, … 왔다 갔다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하고 그 밖의 것들을 먼저 구하게 됩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아니라 이 땅의 보물만 온전히 섬기면 혼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목표가 염려나 걱정이 없는 것이라면, 혹은, … 이 땅의 보물이 우리의 목표라면, … 여러분, … 외람된 말씀이지만, …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이 땅의 맘몬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혼란스러워하며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우리의 정신 건강만 생각한다면, …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오직 한 쪽만 섬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옛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에게로 돌아섰습니까? 가나안 우상이 이스라엘에 풍요를 약속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풍요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풍요를 약속할 뿐만 아니라 풍요를 제공할 능력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맘몬을 섬기는 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늘 머뭇거리는 우리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시험을 주님께서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마 4:9)
늘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고, 늘 왔다 갔다 하는 우리와 달리 우리 주님의 세상을 보는 관점은 명확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하지만 이것이 시험의 끝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는 분명히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다.”(눅 4:13)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끊임없이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세상의 보물을 네게 주겠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마귀야, 물러가라! 나는 너에게 절하지 않겠다. 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보물만 원하신다면 오직 이 세상만 추구하십시오. 이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늘의 보물을 원하신다면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만 추구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지혜입니다. 실제로 맘몬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섬기는 자에게 부와 명예와 이 세상의 보물을 줍니다. 정말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보물을 줄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늘 헷갈리는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맘몬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다가 맘몬을 섬기다가 하다가, … 혼란 가운데 빠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정신과 육신이 건강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증상을 “영적 정신 분열”이라고 부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몸으로는 세상을 섬깁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세상 사람보다도 훨씬 더 세상을 사랑합니다. 주일에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다가 월요일부터는 오직 세상을 섬깁니다. 주님은 이런 “영적 정신 분열”이 걱정의 원인이라고 설파하셨습니다.
즉,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 대로 걱정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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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님은 걱정이 많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계명입니다. 아무리 부드럽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무엇이라고 명령하셨습니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여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생명을 유지하거나 건강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몸을 감싸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 생명의 본질에 속한 것과, 필요하기는 하지만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을 구분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수적인 것들에는 먹고, 마시고, 몸을 감싸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생명의 풍성함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먹고, 마시고, 몸을 감싸는 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건강, 우리의 에너지, 우리의 성공과 실패, 그밖에 우리 삶에서 필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주님의 당연한 질문에 우리는 당연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주님께서 친히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하더라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막 8:36)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과 생명이 본질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핵심은 아닙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핵심적이고도 매우 강력한 주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요? 주님께서는 사실상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는 왜 걱정을 하느냐? 너의 걱정은 목숨이나 생명과 같은 본질적인 것이냐? 아니면 먹고 마시고 몸을 입혀주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것이냐?”
더 나아가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우리 앞에 내세우십니다.
“내가 너에게 묻는다. 너의 목숨은 어디서 왔느냐? 누가 너에게 생명을 부여하였느냐? 누가 지금도 너의 목숨을 이 땅에 유지하도록 허락하셨느냐?”
물론 우리에게는 다른 대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 저는 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고 있습니다.”
갑자기 주님은 우리의 말을 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는 왜 걱정하느냐? 네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갑자기 네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끊으실 이유가 없지 않으냐? 하나님이 네 생명과 네 몸의 필요를 갑자기 공급하시지 않을 이유라도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결국 우리 믿음을 문제 삼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시며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와 논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매일, 매 주일,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에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너는 진정 이것을 믿느냐? 믿느냐? 그런데도 너는 왜 걱정하느냐? 네 믿음이 어찌 그리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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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말씀에서 새와 꽃이 어떤 종류의 새인지 어떤 종류의 꽃인지는 문제가 안 됩니다.
여기서 백합화라고 번역한 꽃도 사실은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꽃이 갈릴리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네모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네모네의 자주색이 고대 독자들에게 솔로몬의 옷을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꽃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갈릴리 들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들꽃들은 지금은 아름답지만, 내일은 시들어서 아궁이의 땔감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들꽃에 비해 수억배 이상 귀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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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주님께서 새와 우리를 비교하심으로서도 우리의 고귀함을 대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단지 기도만 하고 하나님이 해 주시기만을 바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믿음의 자세인양 착각하는 의견을 반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의 복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 역사를 보면, 그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고, 대책없이, …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의 모습인 양 착각한, …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새들이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새들은 놀기만 하고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동안의 새의 대부분의 활동은 먹이를 구하는 활동입니다. 우리 주님은 농부들이 밭을 갈고 써레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곡실을 거두어 곡간에 모으는 모든 활동들을 긍정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살후 3:10)라고 여러차례 엄히 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땀흘려 수고하며 생명의 유지와 복지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이 땅에 제정하신 죄 많은 이 세상의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 (창 3:19)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이 땅에서 노동과 노동의 수고에서 면제 되지 않습니다. 저 하늘에 가서야 우리는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입니다. 단지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만약에 네가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다면 왜 염려하느냐? 너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보다도 하나님께 귀한 존재가 아니냐?”라고 도전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염려와 걱정에 수치를 부여할 수가 있다면 여러분의 수치는 어떻습니까? 극단적인 예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우울장애를 넘어서서 자살할 지경에 이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걱정 수치를 10이라고 해 봅시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를 향한 사랑이 우주 전체를 돌보시는 사랑의 한 천만 배쯤 된다고 믿는다고 해 봅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온전히 믿는 다고 해 봅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걱정 수치는 “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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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 본문, “믿음이 적은 자”라고 지적하시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 우리 주님은 구원의 믿음은 있되 그것에서 멈추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장래에 구원받을 믿음은 있지만 자기 현실 앞에 놓인 산을 옮길 믿음은 없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마 17:20) 우리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여러 걱정과 염려들을 능히 극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작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걱정이나 염려에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걱정과 염려를 타고 들어오는 마귀의 교활한 공격에도 더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작은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사실상 많은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믿고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많은 성경 진리를 믿고 있으면서도 정작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믿지 못합니다.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창조주이심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피값을 주고 사셔서 당신의 기업을 이을 자녀 삼으셨음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진정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엄혹한 현실이 나의 뒤통수를 칠 때 내 믿음은 어느 틈에 온데간데없습니다.
믿음이 적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다는 것은 내가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고 환경을 지배당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현실의 여러 문제들, 걱정이나 우울이나 고난의 결과로 오는 고통에 지배를 당하고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시고 여러분의 문제는 다른 문제가 아닌 여러분의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과대평가하지 마십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안식이 없다면, … 여러분에게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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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교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더는 헷갈리지 맙시다. 마귀는 이 세상의 풍요를 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의 풍요 뿐만 아니라 저 하늘의 풍요도 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영생이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상속받으신 모든 기업을 함께 공유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세상과 저 하늘의 모든 풍요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육체적인 훈련이 가져다 주는 이익은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경건한 생활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그것은 현세의 생명을 약속해 줄 뿐 아니라 내세의 생명까지도 약속해 줍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말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것입니다.” (딤전 4:8–9/공동번역개정) 아멘!
솔로몬의 기도가 완벽한 실례입니다. 영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은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때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곧, 이 땅의 부귀영화가 아닌 소명을 위해 기도하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어떤 응답을 솔로몬에게 주셨습니까?
“네가 너를 위하여 오래 살기도 구하지 않고 부귀도 구하지 않고, 다만 재판할 때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구하였으니, 이 모든 것을 주고 네가 달라고 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화도 모두 주겠다.” (왕상 3:11-13)
바로 이것이 바로 오늘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개역개정)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근심 걱정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2025년에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의 축복과 저 하늘의 축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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