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교회

심판하지 말아라 (마 7:1-6) / 산상수훈 33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계속해서 산상수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느덧 7장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산상수훈 말씀의 마지막을 향해서 치달아갑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 7:1–6)

지난 말씀들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지난 두 번의 설교에서 주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닥칠 두 가지 중대한 위험을 경고하셨습니다. 어떤 위험을 경고하셨습니까?

한 가지 위험은 우리가 이 세상의 보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위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매우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 6:24)

주님의 이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 결국은 하나님 사랑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위험 외에 또 어떤 위험을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염려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를 놓칠 위험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 6:31–33)

이 두 가지가 이 세상에서 저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겪어야 할 위험입니다.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약속의 땅에 다다르려면 오직 한 가지 해결책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이것은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광야길을 함께 걷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님의 해결책입니다. 

7장부터는 공동체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광야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손잡고 걸어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옆에 두신 형제자매는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문제를 다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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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 주님께서는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안에 있고, 우리 가운데도 있는, … “심판의 영”, “심판의 정신”을 문제 삼으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판하고자 하는 성향이 우리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친절하게도 항상 그러하시듯이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왜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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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남을 심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남을 심판했던 그 잣대로 저와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새로 나온 “새한글성경”은 1절과 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남을 판가름하지 마세요. 그리하여 여러분이 판가름받지 않도록 하세요. 여러분이 남에게 한 그 판가름으로 여러분이 판가름받을 테니까요. 또 여러분이 남에게 갖다 댄 잣대를 여러분에게도 갖다 대실 테니까요.” (마 7:1-2/새한글)

명확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면 남들도 우리에게 심판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엄숙한 선언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주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남을 심판하면 남도 나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잘못 해석합니다. 7장 12절의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마 7:12)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남이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빠져드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드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히 10:31/공동번역개정)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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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엄숙한 주님의 말씀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의 엄중성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예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예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요 5:24)

읽어드린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과 신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근거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오해는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 단 한가지만 있다고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세 종류의 심판이 있습니다. (제가 너무 단순하게 설명하는 점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의 이러한 오해는 심판이라는 성경의 용어를 단순하게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한 단어가 단순한 한 가지 의미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심판이라고 하실 때 심판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최종적이고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최종적이고 확정적이고 영원한 심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인간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당신의 심판대 앞에 세우시고 최종적이고 영원한 판결을 내리십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로 나누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식인지를 나누는 심판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나누는 심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믿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도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긴가민가하신다면 안 됩니다. 반드시 후회하게 되실 날이 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심판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 심판은 세상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심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성만찬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1:27–32)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만찬에 관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주님의 자녀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징계하시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도 죄를 범하거나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병과 고통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성도의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병든 사람이 많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미신적인 신앙이라고 그냥 넘겨버릴 일이 아닙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물론 모든 질병과 고통이 하나님 자녀의 죄 때문에 기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병과 고통으로 신음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께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들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내버려 두십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의 고통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심판은 최후 심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의 구원을 위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또 하나의 심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심판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상을 주시기 위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도 두 번째 심판처럼 세상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적용되는 심판입니다. 두 번째 심판를 징계의 심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세 번째 심판은 상급의 심판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에 의하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됩니다. 이 심판대에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에 관해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이 심판을 그림처럼 그려 주셨습니다. (고전 3장) 제가 묘사해 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짓는 집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습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 불이 임할 것입니다. 어떤 집은 그대로 남을 것이고 어떤 집은 불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그런 허황한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의 교훈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상급의 심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고후 5:10)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이런 심판대 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겪을 심판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심판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도하게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날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더 얻든지, 무엇인가를 더 잃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에게 주시는 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무엇인가를 얻을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계 14:1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도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말씀, 곧 우리가 남을 심판하는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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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바울의 말씀 가운데 오늘 주님 말씀에 관한 메아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논증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2:1)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누구나 변명할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남을 심판할 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며 우리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일에 대해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우리가 남을 심판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면 알 수록 더욱더 엄밀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입니다. (눅 12:48)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약 3:1)

저는 실제로 천국에 가면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숙인 많은 목사를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도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설교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심판의 잣대로 주님께서 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우리가 남을 심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선과 악에 관하여, 옳고 그름에 대하여, 의로움과 악함에 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지점에 주님의 강력한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정말로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가 선과 악에 관한 명확하게 분별할 만큼 지혜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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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 마지막 이유에 다다랐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일종의 풍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들보는 집을 지을 때 기둥을 가로질러 걸치는 큰 통나무를 뜻합니다. 티는 통나무를 가공하다가 남은 톱밥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크기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행위가 무엇과 같은 것인지 그림처럼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거의 불가능한 것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주님께서는 사실상 저와 여러분은 남을 심판할 능력도 권리도 권한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옳고 그름에 관해서 진정한 관심을 가졌다면 남이 아니라 먼저 너를 심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자기를 심판하기보다는 남을 심판하기를 더 좋아하는구나. 내가 너희에게 명백하게 말한다. 너에게는 남을 심판할 권리도 능력도 권한도 없다. 심판은 너의 권한 밖이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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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상수훈 주님의 말씀 전체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해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하지 말라는 오늘 말씀이 일차적으로는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성경 전체에 판단과 비판과 심판을 오히려 권장하는 말씀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한 지체가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맘몬을 섬기는 길로 들어선 것을 보았다고 해 봅시다. 혹은 설교자인 제가 설교에 거짓 복음을 섞어서 전하기 시작했다고 해 봅시다. 혹은 우리 지체 중 한 사람이 반복해서 거짓 예언을 지속한다고 해 봅시다. 다른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해 봅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8장에, …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먼저 알게된 내가 그 형제를 은밀하게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도 그 형제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는 바대로 몇몇이 함께 대화를 해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쫓아 내고 불신자와 같이 여겨야 합니다. (마 18:15-18)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정신을 오히려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2절에도 성도가 온 세상을 심판한다고 말씀셨습니다. 당장 오늘 본문에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남을 판단하지 않고, 비판 정신을 예리하게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상대방이 개돼지인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형제자매가 잘못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형제 눈의 티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만 하고 서로의 죄와 죄로 인한 상처를 보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불가능한 것을 명하십니다.

### 결론

오늘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눈의 들보 가운데 하나는 심판의 정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심판의 정신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내가 도와주어야 할 형제보다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봅니다. 그리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심판하고자 하는 악한 성향은 다른 지체 속에 있는 어떤 죄보다도 큽니다. 지체의 속에 있는 죄가 티라면 우리 속에 있는 심판의 영은 들보와 같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럽고 때로는 죽음과도 같은 과정입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형제자매를 볼 때 심판의 영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니셨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겸손의 영으로 나 자신과 지체들을 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비로소 형제자매의 허물이 티로 보이고 나의 허물이 들보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쟁의 영이나 허영의 영이나 교만의 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만이, … 이른바 “영적 안과 시술”과 같은 예민한 작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들보가 교만의 들보 뿐이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더욱 심각한 들보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랜 관계로 인한 선입견의 들보입니다. 우리가 서로 오랜 관계를 맺어 왔고 많은 사연들을 쌓아 갔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이미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이유로 가족이 다른 가족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가 더욱 힘들고 교회 공동체 안의 인간 관계도 이러한 것이 크게 작용합니다. 우리 교인끼리는 오랜 관계 속에서 오는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있게 마련입니다. 

조언을 해야 하는 쪽은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 안의 들보를 못보기 쉽습니다. 심판의 영이 사랑의 영보다 우세하면 조언을 들어야 하는 쪽은 금새 눈치를 챕니다. 저도 아직까지 제 안의 들보를 들어내지 못해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지체가 많다고 느낍니다. 저는 이미 많이 변하였지만 저의 교만으로 상처받은 지체들의 마음을 되돌릴 길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빕니다.

빌립보서는 보면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셨습니다. (빌 2:3-11) 그런데, 왜 우리는 이다지도 교만할까요? 왜 내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할까요? 왜 자꾸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고만 할까요? 왜 내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도 형제자매의 티를 없애려고 시도할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서로에게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마음 속에는 심판하는 영을 품은 채 모여 앉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앉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사도들의 권면 대로 진리 안에서 참된 말을 하고(엡 4:25) 각자가 성장하여 마땅히 자기의 짐을 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짐도 져줄만큼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 6:1-10)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2025년 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2025년에는 내 눈의 들보를 뽑아내고 형제자매의 티를 뽑아주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하늘 보물의 귀중함을 모르는 개돼지와 같이 여기지 않는 은혜가,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주님께 개돼지 같이 되지 않기를, …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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