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여라 (마 7:7-11) / 산상수훈 34
by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하나님 말씀입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마 7:7–11)
주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찾게 하시고, 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반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구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기쁨에 넘칠 것이다.”(요 16: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 우리가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은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 17:13) 주님께서는 “내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내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누리셨던 기쁨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 (요 14:27) “내 평화”입니다. 개역개정은 “평안”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누리셨던 바로 그 평화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가장 힘드셨던 순간은 아마도 사랑하던 모든 사람이 떠나고 홀로 사명의 짐을 지셔야만 했던 때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의 말씀은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 16:32)
저는 주님처럼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을 이기는 삶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함으로써 기쁨을 잃지 않고, 평안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싸우는 그런 삶을 저는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주님처럼 사셨던 것 같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고대인이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고향 땅을 떠나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서 가면서도 기쁘고 평화로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는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히 11:8-10)
이런 것들이 우리 하늘 아버지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좋은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삶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꽃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삶에는 여전히 고난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녀들은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왜요?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녀인 우리에게도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뻐하며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왜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누구와 가는 지는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기는 좋은 것은 단지 기쁨과 평안만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오늘 주님의 약속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크고 포괄적인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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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을 따로 뚝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산상수훈 전체의 맥락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까지 배운 산상수훈 전체의 교훈을 되살려 보겠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사실상 우리가 불가능한 것들을 명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산상수훈의 교훈을 실천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 의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헝제자매에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성을 완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의로운 일을 행할 때 사람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만 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도, 맘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불가능한 명령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하고 계십니다.
누가 감히 이 말씀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주님께 엎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지난 주일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크고 두려운 그 날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울에 달아보실 것입니다. 우리 중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준은 너무나 높고,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낮습니다. 주님의 요구는 저 하늘의 요구이고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하신 자녀된 저와 여러분은 마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때까지 읽고 묵상한 산상수훈의 교훈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입을 열어 베푸셨던 은혜로운 첫 일성을 되살려 보십시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 5:3)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쁨과 평안은 단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자녀에게 주실 유산과 기업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된 우리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자녀에게 주십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녀에게 주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녀는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를 그친 자녀는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수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을 모두 상실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확언하시고, 강조하시고, 암시하십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하게나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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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여러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갈망은 이 땅에서 살면서 저 하늘이 이상과 이 땅의 현실 사이에서 찢기고 뭉개져서 거의 절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이요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자녀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위로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갈망, 이런 욕망, 이런 배고픔이 있는 자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도 배고픈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좋은 것들을 향해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하지만, 이미 구하기를 그친 사람들, 찾기를 그친 사람들, 문을 두드리기를 그친 사람들에게는 남은 것들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런 갈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욕망하고 있습니까? 본질이 아닌 것들을 욕망하고 있습니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구하는 것들을 욕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늘 아버지만이 당신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욕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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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의 병행 구절이 누가복음 11장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한밤중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는 먼 길을 온 친구를 반드시 먹여야 합니다. 현대인에게는 별일 아닐 수가 있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배고픈 친구를 먹이지 못한다면 큰 일입니다. 곤하게 자는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밤중에 깬 친구는 친구로서가 아니라 빵을 주지 않으면 친구가 계속 문을 두드릴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줍니다. 주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눅 11:8–9)
이것이 누가복음에서 강조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바로 인내와 끈기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갈망한다면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명령입니다.
2025년에 여러분은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2월 첫 주일을 지나는 우리 결심을 점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첫째, 여러분의 결심은 어떤 갈망으로 인한 결심입니까? 어떤 것들을 간절히 원하기에 여러분은 그런 결심을 하셨습니까? 혹시라도 거듭된 실망으로 아무런 결심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둘째, 여러분의 결심은 지켜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2월 첫째주에도 여전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계십니까?
셋째, 혹시라도 여러분의 마음에는 아무런 갈망이 없습니까? 2025년에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반드시 주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기도하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염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갈망하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고, 마음에 간절한 소원을 품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도 없는 상태를 우리 주님이 염려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 바로 우리 마음에 뜨거운 갈망같은 것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는 정상이 아닙니다. 영적 침체요 영적 우울증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13–14)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태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2025년 저와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형편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좋은 것을 충만하게 받지 못하고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저와 여러분이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종종 실패하는 지점은 어디입니까? 갈망의 지점입니다. 끈기와 인내의 지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는 달리 믿음의 싸움을 그쳐버린 바로 그 지점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일종의 믿음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마태복음 10장 22절 주님의 말씀처럼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마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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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은 하나님 자녀들에게만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자녀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주님께서 설득하시는 논리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것이 우리 주님의 논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늘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첫 번째 문제는 부족한 갈망입니다. 원하기는 원하되 그리 원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원한다고 고백은 하지만 사실은 크게 원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원하되 내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라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반드시 주신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나의 갈망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의 갈망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네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아느냐? 너는 하나님의 욕망을 아느냐? 너는 하나님의 갈망을 아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갈망으로 너를 갈망하신다.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너밖에 없다. 너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느냐?” 이것이 우리 주님의 도전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만큼 그렇게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갈망, 사랑의 욕망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선택하신 소수의 사람들은 영접하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요 1:11, 12) 성령께서는 소수의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과 함께 새 본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본성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악한 마귀의 자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시고 입양의 영이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때 우리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달라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염려하시며, 늘 지켜보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위한 특별한 계획을 세우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된 모든 사람의 믿음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고백하는 그 믿음으로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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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모가 될 때 우리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녀를 사랑하더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 하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원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사랑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자녀 사랑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당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신 하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하겠습니까?
둘째, 우리 지혜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 자녀에게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녀가 중년에 가장 행복해할 직업이 무엇인지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모는 자기 욕망을 자녀에게 투영하지만 그것은 자녀를 망치는 길입니다. 때로 어떤 것을 공급하는 것이 좋을지 알지라도 언제 자녀에게 그것을 주는 것이 가장 자녀에게 유익한지 우리가 압니까? 이 모든 지혜의 영역에서 우리의 자녀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확신하더라도 그것을 공급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자녀에게 공급할 수 있는 우리의 선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인된 우리의 자녀 사랑의 한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아버지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언제 필요한지, 하나님의 공급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완벽하게 아신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는 전지 전능하셔서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언제나 공급해 주실 수가 있다. 하나님은 항상 너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신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믿는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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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오늘 말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것이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더욱 확실하고 강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포괄적이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더 알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경험하여 우리 믿음이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 누가는 오늘 주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에게 속한 모든 것, 모든 능력, 모든 지혜, 모든 선물을 주십니다. 성령님안에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벧후 1:3)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저는 수년간, 이른바 믿음의 싸움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께 설교하면서, …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힘입어서 살았다고 여러분께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제 나이가 어느덧 64세에 접어들었습니다. 제 삶을 돌이켜보면 주님 앞에 부끄러움뿐입니다. 하지만 저의 미래는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 고백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에 새로운 갈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생각해보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의 갈망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즉시 주셨고, 어떤 때는 오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확실하게 거절하셨고 어떤 때는 계속 구하라고 격려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절대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좋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저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 실수하시지 않으셨으며 앞으로도 실수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항상 제가 문제였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갈망하지 않고, 갈망하지 않기에 인내와 끈기로 구하지 못한 제가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달라진 지점입니다.
2년 전에 정밀 심리 검사를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심리상담가에게 저의 과거는 축복된 것이었고 점점 좋아지는 것이었고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 기대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너무 뻔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갈망이 있습니까?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리 안정제가 아닙니다. 단지 필요할 때 약장에서 꺼내서 먹을 수 있는 항우울제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만이 저와 여러분의 미래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불확실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암울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갈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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